잔금 하루 전, 세입자가 “안 나가요”라고 했다면? – 대법원 2023다269139 판결 해설
아파트를 실거주 목적으로 매수하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매도인과 계약도 잘 체결했고, 잔금만 치르면 집은 자신의 것이 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잔금 지급일 바로 전날, 이 아파트에 살고 있던 세입자가 갑자기 말을 바꿉니다. “저, 계약갱신요구권 쓸게요. 앞으로 2년 더 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세입자의 태도 변화에 매수인은 당황했고, 결국 잔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매도인은 “계약을 위반했다”며 계약 해제를 주장했고, 양측은 법정에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계약 후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을 때, 당사자가 자신의 의무 이행을 거절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법원이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판례입니다.
먼저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매수인(갑)은 실거주할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기로 했습니다. 계약 당시 해당 아파트에는 임차인(병)이 살고 있었는데, 병은 “계약 끝나면 집 비워줄게요”라고 확답을 했습니다. 갑은 그 말을 믿고 매도인(을)과 매매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계약서에는 잔금일과 실제 명도일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세입자가 퇴거하는 것을 전제로 한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잔금 지급일 직전에 임차인 병이 돌연 태도를 바꾸고,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로 인해 매수인은 자신이 실거주할 수 없게 될 위기에 처합니다.
매수인은 이 사정 때문에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매도인은 “계약 이행을 하지 않았으니 계약을 해제하겠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제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매수인은 계약상 잔금을 먼저 지급해야 하는 선이행의무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둘째, 세입자가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함으로써 매도인이 집을 넘겨줄 수 없게 되었을 때, 매수인이 잔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대법원은 이 문제를 민법 제536조 제2항에 따라 판단했습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선이행의무를 지고 있는 당사자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의무 이행이 현저히 곤란해졌다면, 자신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심의 판단을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습니다.
첫째, 매수인은 원칙적으로 잔금을 먼저 지급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계약 체결 당시 세입자가 퇴거를 약속했고, 매도인은 이를 전제로 집을 팔았기 때문에, 그 조건이 무너졌다면 매수인의 의무도 일시적으로 유예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둘째, 세입자가 잔금 지급 직전에 돌연 계약갱신권을 행사한 것은 계약 당시 예측할 수 없었던 중대한 사정 변경입니다. 매도인이 집을 비워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매수인이 잔금을 잠시 미루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셋째, 계약서에는 실제 명도일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잔금일 전에 매도인이 임차인을 상대로 인도 준비를 해야 했다는 점도 고려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차인의 말 바꿈으로 인해 인도가 어렵게 된 이상, 매수인이 선이행을 거절할 사유가 생긴 것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매수인이 잔금을 내지 않은 것이 단순한 계약 위반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행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무 이행을 유보한 정당한 대응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계약 이후 상대방의 의무 이행 가능성이 떨어졌을 때, 선이행의무를 가진 사람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의무를 멈출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해줬다는 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상황은 자주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먼저 결제한 뒤 받아야 하는데, 상대방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면 먼저 돈을 주는 게 위험하겠죠. 바로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원칙이 바로 이 판례에서 말하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배워야 할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계약은 그 문구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계약 당시의 전제와 배경까지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계약 이후 상대방의 이행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떨어졌다면, 나의 선이행 의무도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정성과 신의에 따른 판단이어야 하며, 개인적인 추측만으로 정당화되긴 어렵습니다.
셋째, 부동산 거래에서 임차인의 계약갱신 여부는 매우 민감한 요소이며, 이를 둘러싼 말 바꿈이 거래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매도인과 매수인 모두 확정적인 퇴거 일자에 대해 명확히 확인하고, 가능한 한 서면으로 약속을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법원 2023다269139 판결은 계약과 그 후의 사정 변경이 얽힌 상황에서 양 당사자의 의무와 권리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기준이 됩니다. 앞으로 실거주 목적으로 집을 사거나, 임차인이 있는 집을 사고팔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계약은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속엔 많은 상황과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판례는 그 신뢰가 흔들렸을 때, 어떻게 법이 균형을 잡아주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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